1. 제자로 부름 받은 유다, 처음부터 배신자였는가
가룟 유다는 예수님께서 직접 선택하신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의 이름 앞에 붙은 ‘가룟’은 지리적 배경을 나타내며, 유다가 다른 제자들과 달리 유대 남부 출신임을 시사한다. 그가 제자단의 회계를 맡았다는 점은, 처음부터 일정한 신뢰를 받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유다가 도둑이었으며, 돈궤를 맡고 있으면서 종종 그 돈을 훔쳤다고 비판한다. 이러한 기록은 그가 처음부터 마음이 온전치 못했음을 암시하기도 한다. 하지만 성경은 유다의 배신을 단순한 개인적 야망이나 탐욕의 결과로만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의 구속 역사 속에서 그 배신이 예수님의 죽음과 연결되는 신비로운 계획의 일부였음을 복수의 구절에서 강조한다. 예수님은 유다를 선택하시며 “너희 열둘을 내가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 하나는 마귀니라”고 말씀하셨고, 이는 유다가 본래부터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는 인물임을 암시한다. 이로 인해 유다는 단순한 악인의 전형이라기보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인간의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주권이 교차하는 상징적 존재로 이해된다.
2. 은 삼십과 입맞춤, 배신의 행위에 담긴 의미
유다는 예수님을 팔기로 작정한 뒤, 대제사장들과 거래를 하고 은 삼십을 받는다. 이는 구약에서 종이 팔릴 때의 가격이며(출애굽기 21:32), 스가랴서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사자를 평가한 금액으로 나타난다(스가랴 11:12-13). 따라서 이 금액은 단순한 거래 이상의 상징을 갖는다. 유다는 이후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께 입맞춤으로 배신한다. 입맞춤은 사랑과 존경의 표시이지만, 유다에게 있어서는 위선과 배신의 도구였다. 예수께서는 이 순간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고 말씀하심으로써, 이 배신의 행위에 담긴 도덕적, 영적 심각성을 드러내신다. 유다의 행위는 그 자체로 끔찍한 배반이었지만, 동시에 예수님의 체포와 고난, 십자가 죽음이라는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여는 열쇠가 된다. 이 긴장 속에서 우리는 인간의 악한 의도가 오히려 하나님의 선한 목적을 이루는 데 사용될 수 있다는 성경의 깊은 역설을 발견하게 된다.
3. 유다의 회한과 자살, 용서의 가능성은 있었는가
예수님이 체포되고 재판을 받는 과정을 지켜본 유다는 깊은 후회를 느끼며 은 삼십을 돌려주려 한다. 마태복음은 그가 자신이 무죄한 자의 피를 팔았음을 인정하고, 받은 돈을 성전에 던진 후 나가서 목매어 자살했다고 기록한다. 유다의 회한은 단순한 후회가 아니라, 죄책감과 절망 속에서 자신을 감당하지 못한 극단적 반응이었다. 그러나 그가 진정한 회개를 했는지, 아니면 단지 결과에 대한 두려움과 양심의 가책에 불과했는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베드로 역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지만, 그는 눈물로 회개하고 회복되었다. 반면 유다는 회개 없이 절망 속에서 자기 목숨을 끊었다. 이 차이는 죄의 크기보다도, 하나님의 은혜를 향한 마음의 태도에서 비롯된다. 유다의 자살은 인간의 연약함과 한계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며, 동시에 회개 없는 후회의 무서운 결말을 경고한다. 신학자들 사이에서는 유다가 용서받을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의견이 갈리지만, 성경은 그의 선택이 인간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동시에 이루어진 것으로 간주한다.
4. 복음서에서 유다가 남긴 상징성과 오늘날의 교훈
가룟 유다는 성경 속에서 단순한 한 인물이 아니라, 영적 진실을 드러내는 거울로 작용한다. 그는 오랫동안 예수님과 함께 있었지만, 그분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고, 자신의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유다는 예수님을 파는 순간까지도 스승에 대한 외면적 충성은 유지했지만, 마음은 이미 하나님과 멀어져 있었다. 이로 인해 그는 위선과 내면의 타락이 어떻게 종교적 외형 속에서도 자라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경고의 인물로 남는다. 유다의 삶은 신앙의 본질이 단지 외적인 행위나 직분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내면적 관계에 있다는 점을 일깨운다. 또한 그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참된 신앙과 위선이 공존할 수 있다는 사실을 경고하며, 우리 각자에게 성찰의 거울이 된다. 예수님조차도 자신의 제자들 중 한 명이 배신할 것을 아시면서도, 그를 품고 사랑하셨다는 점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악함을 포함한 모든 것을 섭리 가운데 이끄신다는 깊은 신앙의 신비를 보여준다.